사회적 관계의 기본

모 공기업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밤이다. 아주 착수부터 따지면 6개월 가량이 소요되었다. 서너시간 투자하면 이제 마무리다. 과정과정에서 여러가지 이슈가 있었지만, 프로젝트를 둘러싼 것에서 배운 점이 많은 프로젝트였다. 새벽에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하겠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에 나와 일하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의 기초 덕목은 무엇인지 되물어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직무능력이다. 특히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탁월한 전문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기준 이상의 전문성이 관계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다. 직무능력인 이유는 그것에 따라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 계약이라는 절차를 거치지만, 계약을 포함한 모든 합의가 업무능력을 기초로 한다. 그리고 약속의 근간에는 '업무'를 중심으로 한 책임과 역할이 존재한다. 한 회사건, 컨소시엄이건, 아웃소싱이건, 최소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낯부끄러운 행동일 것이다. 나도 그런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되건 안되건 부단히 애쓰는 중이다. 사회는 참 자연스럽고 사람들은 생각이 비슷해서, 이런 낯부끄러운 사람들과 두번째 일할 기회를 갖는 것에는 대부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인간적인 매력은 그 다음이다. 성격이 바르고, 생각의 방향이 따르고 싶은 것은 전문성이 인정받을 때라야 빛을 발한다. 성품이 훌륭하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고(물론 이것도 전문성에 포함된다면 되는 것이지만) 정직하고 등은 가산점이 될지언정 전문성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사회에서 인간적인 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은 최소한의 전문성이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 인간적인 관계가 원만치 못하고 소외된다면 전문성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전문적인 일을 하겠다는 직군에서는 그러하다.

하지만 누구나 입문단계부터 전문성을 갖지는 않는다. 모두가 백지상태이다. 다만 개개 본인이 내면적으로 갖고 있는 완성도의 기준은 갖고 있다. 그 기준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느 선인지 하는 것이 바로 전문가가 될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한 수 있는 지점이다. 비록 지금은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기에 부족할지언정, 스스로 가야할 목표치를 세우고 늘 부족함을 채찍하는 사람이 전문가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커리어에 걸맞는 아웃풋도 나오고 하는 것이다. 시작하는 시점은 비슷할지라도 양상은 극과 극이다. 결국 전문성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기준'이 공유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대화가 필요가 없어진다. 한 사람은 이건 아직 결과물로 내놓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를 맞받아치는 사람은 어디가 문제냐고 도리어 문제삼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런 대화가 나올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비슷한 기준의 사람끼리는 형편없는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이 형편없는 내용을 보여줄 때에는 본인 기준에는 꽤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과물이 테이블에 올려지게 되면 대개 모두의 말문을 막는다.

가끔 '하면 잘하는데'라는 식의 리액션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건 전문용어로 '중2병'이라 부를 수 있다. 프로세계에서 안하면 안한거지 안했는데 잘하는 사람일 수는 없다. 오히려 해서 안된 사람이 다시해서 성공하고 레벨을 올려가는 곳이 프로세계라고 생각한다. 프로세계는 시도를 폄하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시도만이 성과로 옮겨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손가락으로 일하는 직군에서 본인이 프로젝트에 무관심하면 옆에서는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머리를 써야하는 일에서는 명령과 채찍이 설 자리는 없다. 조직의 책임이 아니라 본인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리더의 동기부여 뿐일테다. 하지만 동기부여 역시 그 전제는 들을 귀를 가졌는지이다. 그러니 결국 일을 대하는 태도로 다시 귀결된다. 정확히는 단어 하나를 더 얹어서 '일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옳겠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본인의 책임이다. 조직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머리와 손가락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사실상 없다. 전문가냐 꼰대냐의 갈림길이 이 지점이다. 전문가는 변화하고 스스로를 붙잡고 늘어진다. 꼰대는 변하지 않고 조직과 리더를 탓한다. 안타깝게도 시작부터 꼰대로 출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꼰대의 길은 평탄한 둘레길이다. 숨도 안찰뿐더러 한참을 가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런 사람들은 어서 빨리 이 트랙을 벗어나는 것이 현명하다.

형편없는 결과물은 근무태도나 관심도와 무관할 수도 있다. 오히려 기준점이 아주 낮거나, 또는 형성되지 않았거나, 상황을 통해 배우거나 고칠 태도가 결여된 케이스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런 긴 문장은 조직 안에서 '수준'이라고 번역된다. 조직 내 구성원 간 수준이 맞으면 같은 시간을 써서 2배 혹은 3배 이상의 결과물을 만든다. 반대로 수준이 안맞으면 두세배의 시간을 쓰고 더 구린 결과물이 나온다. 한 사람의 낮은 수준 때문에 나머지 탁월한 사람들의 시간과 역량이 소모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직무능력과 일을 대하는 태도라는 점을 사회생활 4년차를 맞이하는 즈음에 몸으로 깨닫고 있다. 그동안 탁월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잘 모르고 살았다. 다행히 이 그룹에서는 함께 바라보는 기준점이 매우 높다. 낮은 내가 높게 맞춰갈 수 밖에 없다. 

보고서를 열어 두번째 챕터를 쳐다보고 있으니 바쁜 와중에도 한번 정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벽시간을 통해 글로도 생각을 정리하고, 사회적 관계도 정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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